[Book & Story] 오래된 정원, 거기엔 누가 있을까?
독방에서 오래 버티다 보면 자잘한 감정들은 대개 두터운 무감각 속으로 깊이 숨는다. 겉으로 드러내보아야 생명활동에 전혀 이로울 게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말을 잊어먹기 시작한다. 빤한 단어들인데도 막상 입에 올리려면 생각이 나질 않는다. 기억에서 사라진 단어들이 차츰 많아지고 주위 사람들의 이름까지 잊어버린다. 그런 단계를 지나면 눈앞에 보이는 생활도구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다. 가만있자, 저 물건의 이름이 뭐더라. 그래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증상이 생긴다. 자신에게 이야기를 걸곤 한다. 이 사람아, 인젠 잘 시간이 됐네, 라든가 저 담당 자식은 너무 규칙만 따져, 또는 자신이 방귀를 뀌고서도 혼잣소리로 어이 되게 구리네, 하고 중얼거린다. 수인들 중에도 장기수들은 좀처럼 웃거나 울거나 하지 않는다. 시청각교육 시간에 영화를 보면서는 어둠속에서 끝없이 눈물을 흘리며 실컷 운다. 영화가 끝나고 나올 때 보면 그들은 거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다. 오랜 독거수의 특징은 감정의 표현을 빼앗긴다는 데 있었다. 우선 타인과 감정을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말을 잃고, 감정을 잃고 추억조차도 표백되어버린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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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오래된 주택가에 살고 있다. 빨간 벽돌로 쌓은 2층 슬라브 집 사이사이 단층 구옥들이 있는 변두리 작은 동네다. 허름하고 허술하기 그지없는 그곳엔 좋은 점이 딱 한 가지 있다. 적막함이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이 되어 돌아오는 그녀는 이웃들의 들락거리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쿵쿵 울리는 위층의 발걸음 소리, 배관을 통해 쉴새 없이 흘려 보내는 물이 내는 생활 소음이 전혀 없다. 누군가와 부대끼고 있다는 기척들이 여기저기서 수시로 확인되는 아파트 생활과 다르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누군가로 인해 불편을 느껴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녀는 좋아하는 이웃이 없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이웃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녀는 누구와 이웃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뿐이다. 이로 인해 그녀가 불편했던 적은 결단코 단 한번도 없다.
퇴근길 골목으로 들어선 그녀는 야트막한 담 너머 어른거리는 인기척에 움찔한다. 담배를 피우러 마당에 나온 중년 남자다. 그녀는 처음으로 이곳에도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디선가 김치찌개를 끓이는 냄새가 어스름하게 배어나고, 제법 큰 개가 컹컹 짖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고 보니 골목 초입 집 안마당의 감나무에 달린 먹음직스러워 보이던 대봉시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쓰레기를 모아가는 날인가 보다. 미어질 듯 아슬아슬한 봉투가 집 앞마다 놓여있다. 누군가 그 집에서 들여 내온 것이 분명하다. 그들도 그녀처럼 매일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느닷없이 궁금해졌다. 한번도 마주친 적 없는 아니 어쩌면 내내 마주칠 일이 없을 이웃 말이다. 파란색 대문을 밀고 집으로 들어선 그녀는 전등도 TV도 켜지 않고 곧장 침대로 가 덜렁 누워버린다. 가만 있자, 컴컴하고 조용한 방에 가만히 누워있던 그녀의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창을 맞닿은 옆집에서 소리를 높인 TV에서 들리는 웃음 소리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되지 않는 말소리가 들린다.
Written by sear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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